웅크리고 걷던 계절이 어제 같은데, 여름이 코앞입니다. 많은 이가 계절을 말할 때는 ‘어느새', ‘벌써’ 같은 수식을 덧붙이곤 하죠. 정작 계절의 한가운데에서는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서야 시간의 속도를 실감합니다. 모든 기억이 그렇습니다. 현재가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해도,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찰나라 아쉽기만 하지요.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생애주기에 따라 다릅니다. 각자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볼까요. 하루가 길고, 일주일은 지난하고, 일 년은 아득하지 않았나요. 시간이 켜켜이 누적되어 노년에 접어들면, 체감하는 하루는 더 짧고, 일 년 전은 어제 같아진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 걸까요. 삶의 어느 시점에는 추억만으로도 살아지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아득한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 우리는 이를 ‘향수’ 또는 ‘노스탤지어'라 부르지요. 당신에게도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혹은 장면이 있는지요. 그 대상을 정확한 형태로 표현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낡은 사진 속 나의 모습은 그 시절에 살았던 나를 증명할 뿐, 기억으로 와닿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요. 옛 사진 속에서 향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사진 속 나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그날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을 테죠. 우리가 향수를 느끼는 장면은 생각보다 단조로운 모습일 거예요. 해 질 녘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 놀이터 그네에서 느껴지는 녹슨 철의 쌉싸름한 냄새, 버스 안에서 바라본 건물의 외벽 같은 것들이요.
어린 시절을 사진으로 묘사하는 작가
© Ian Howorth
우리의 그리움이 시각예술로 표현된다면 어떨까요. 이러한 상상을 현실로 만든 영국 기반 사진작가 ‘이안 호워스(Ian Howorth)’를 소개합니다. 이안은 ‘소속감’을 탐구하는 작가입니다. 영국인 아버지와 페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6세 이전까지 3개의 나라, 9개의 집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정착 생활이 일반적인 이들은 자연히 나고 자란 지역에 소속감을 갖는 반면, 이안이 소속감을 느끼는 지점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집’이라는 개념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이 과정은 그에게 일상적인 풍경도 달리 바라보는 영향을 미쳤지요.
“제게는 항상 불안과 불확실성이 있었어요. 이런 감정 중 상당수는 제가 겪은 변화와 관련이 있고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스로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죠.” - 이안 호워스
© Ian Howorth
사진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어떤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어 보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 한 장면을 포착한 스틸컷 같기도 하죠. 고유한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배경과 그가 사용하는 도구의 영향이 있습니다. 우선 이안은 사진 작업 이전에 비디오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한 바 있는데요. 사운드와 결합된 영상, 뮤직비디오, 단편 영화 같은 작업을 주로 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의 서사 속에 만들어진 장면을 구현하는 데에 능숙한 편이죠. 또한 그는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고집합니다. 여러 번 셔터를 누를 수 없다는 제한과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였다고 해요. 영화를 만들던 이의 장면 구현력,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탄생하는 진정성이 그의 사진을 남다르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필름 사진이 디지털 사진보다 유한하고 불완전하다는 점이 좋아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사진에 흠집이 생기거나 빛이 샐 수도 있잖아요. 결과물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흥미로워요.” - 이안 호워스
한산한 레스토랑, 다 마신 콜라
© Ian Howorth
© Ian Howorth
장면은 빛이 공간에 번지는 방식에 따라 달리 각인됩니다. 일상적인 장면, 평범한 사물도 빛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히기도 하고요. 이안의 작품집 <A Country Kind of Silence>에는 순간의 고요함을 포착한 사진이 수록돼 있습니다. 작가의 기억과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이지만, 감상자는 자연스럽게 그 순간에 머물렀을 이의 감정을 상상하게 됩니다. 해가 뉘엿한 식당의 한산함, 간헐적으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바깥의 작은 소음들. 그 고요함 속에 머물며 어떤 외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를 순간. 또는 초록이 무성한 여름날, 야외 테이블에 앉아 물기를 머금은 풀과 흙냄새를 들이마시던 어느 날. 경험한 적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기보다 언젠가 한 번쯤 겪었을 순간을 연상하게 만드는 그의 사진은 노스탤지어를 선사합니다.
© Ian Howorth
© Ian Howorth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흥미롭습니다. 위 두 사진을 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기기 이전에 내(촬영자)가 멈춰 선 위치 혹은 시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파도치는 바다가 아닌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는 이들을 바라보고, 높고 넓은 하늘을 조명하는 게 아닌 아스팔트로 이어진 길과 집을 함께 담습니다. 두 작품 모두 언젠가 보았던 풍경이 떠오르진 않나요? 우리는 해변의 아름다움을 감탄하기 이전에 근방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습니다. 또, 집으로 향할 때에는 매끄럽게 포장된 길과 하늘을 올려다보길 반복하죠. 이처럼 작가는 일상적인 풍경을 기존과 다른 시각에서 담아냄으로써 각자의 서사로 재해석할 여지를 남깁니다.
순간의 냄새까지 묘사하는 사진
© Ian Howorth
이안의 작품이 놀라운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가 자연광과 그림자를 활용하는 만큼, 작품 속 사물의 질감이 도드라지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환한 빛 속에 머무는 사물은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이 공존할 때 음영이 생기면서 입체적인 이야기가 깃들죠.
© Ian Howorth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창밖에서 차 안의 풍경을 담은 첫 번째 사진을 살펴볼까요. 짙은 농도와 사용감이 느껴지는 가죽 표면, 낡은 자동차 가죽 시트의 냄새가 절로 느껴지는 듯합니다. 차 안의 온도는 어떨지, 어떤 사람이 사용했을지 이야기가 흐릿하게나마 그려지고요. 두 번째 사진은 누군가 다녀간 (지금은 자리에 없는) 테이블을 비춥니다. 깨끗이 비운 컵, 먹다 남은 감자튀김의 눅눅한 존재감, 테이블의 어수선함은 그 현장으로 감상자를 초대합니다. 두 사진 모두 분명히 존재했을 어떤 순간을 상상하게 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부재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 Ian Howorth
© Ian Howorth
이안의 사진 속에서 어떤 그리움이 느껴지나요? 아니면 외로움을 발견했나요. 이안이 포착한 장면은 마냥 행복하다거나 따스하지만은 않습니다. ‘향수’를 이야기하지만, 그 순간을 결코 낭만화하진 않아요. 홀로 남겨진 이의 고독, 거대한 풍경 속 자그마한 인간, 덩그러니 놓인 사물. 그리움과 공존하는 외로움이 작가가 전하고자 한 감정이 아닐는지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고요’입니다. 고요는 평화를 감각했던 순간을 돌이켜 봤을 때 떠오르는 잔상이고요. 소란함 속에서 평온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홀로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가질 때, 오롯한 현재를 누리게 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리운 순간은 언제인가요. 그리고 그 순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www.ihoworth.com
웅크리고 걷던 계절이 어제 같은데, 여름이 코앞입니다. 많은 이가 계절을 말할 때는 ‘어느새', ‘벌써’ 같은 수식을 덧붙이곤 하죠. 정작 계절의 한가운데에서는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서야 시간의 속도를 실감합니다. 모든 기억이 그렇습니다. 현재가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해도,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찰나라 아쉽기만 하지요.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생애주기에 따라 다릅니다. 각자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볼까요. 하루가 길고, 일주일은 지난하고, 일 년은 아득하지 않았나요. 시간이 켜켜이 누적되어 노년에 접어들면, 체감하는 하루는 더 짧고, 일 년 전은 어제 같아진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 걸까요. 삶의 어느 시점에는 추억만으로도 살아지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아득한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 우리는 이를 ‘향수’ 또는 ‘노스탤지어'라 부르지요. 당신에게도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혹은 장면이 있는지요. 그 대상을 정확한 형태로 표현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낡은 사진 속 나의 모습은 그 시절에 살았던 나를 증명할 뿐, 기억으로 와닿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요. 옛 사진 속에서 향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사진 속 나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그날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을 테죠. 우리가 향수를 느끼는 장면은 생각보다 단조로운 모습일 거예요. 해 질 녘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 놀이터 그네에서 느껴지는 녹슨 철의 쌉싸름한 냄새, 버스 안에서 바라본 건물의 외벽 같은 것들이요.
어린 시절을 사진으로 묘사하는 작가
© Ian Howorth
우리의 그리움이 시각예술로 표현된다면 어떨까요. 이러한 상상을 현실로 만든 영국 기반 사진작가 ‘이안 호워스(Ian Howorth)’를 소개합니다. 이안은 ‘소속감’을 탐구하는 작가입니다. 영국인 아버지와 페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6세 이전까지 3개의 나라, 9개의 집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정착 생활이 일반적인 이들은 자연히 나고 자란 지역에 소속감을 갖는 반면, 이안이 소속감을 느끼는 지점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집’이라는 개념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이 과정은 그에게 일상적인 풍경도 달리 바라보는 영향을 미쳤지요.
© Ian Howorth
사진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어떤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어 보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 한 장면을 포착한 스틸컷 같기도 하죠. 고유한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배경과 그가 사용하는 도구의 영향이 있습니다. 우선 이안은 사진 작업 이전에 비디오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한 바 있는데요. 사운드와 결합된 영상, 뮤직비디오, 단편 영화 같은 작업을 주로 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의 서사 속에 만들어진 장면을 구현하는 데에 능숙한 편이죠. 또한 그는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고집합니다. 여러 번 셔터를 누를 수 없다는 제한과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였다고 해요. 영화를 만들던 이의 장면 구현력,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탄생하는 진정성이 그의 사진을 남다르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한산한 레스토랑, 다 마신 콜라
© Ian Howorth
© Ian Howorth
장면은 빛이 공간에 번지는 방식에 따라 달리 각인됩니다. 일상적인 장면, 평범한 사물도 빛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히기도 하고요. 이안의 작품집 <A Country Kind of Silence>에는 순간의 고요함을 포착한 사진이 수록돼 있습니다. 작가의 기억과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이지만, 감상자는 자연스럽게 그 순간에 머물렀을 이의 감정을 상상하게 됩니다. 해가 뉘엿한 식당의 한산함, 간헐적으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바깥의 작은 소음들. 그 고요함 속에 머물며 어떤 외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를 순간. 또는 초록이 무성한 여름날, 야외 테이블에 앉아 물기를 머금은 풀과 흙냄새를 들이마시던 어느 날. 경험한 적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기보다 언젠가 한 번쯤 겪었을 순간을 연상하게 만드는 그의 사진은 노스탤지어를 선사합니다.
© Ian Howorth
© Ian Howorth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흥미롭습니다. 위 두 사진을 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기기 이전에 내(촬영자)가 멈춰 선 위치 혹은 시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파도치는 바다가 아닌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는 이들을 바라보고, 높고 넓은 하늘을 조명하는 게 아닌 아스팔트로 이어진 길과 집을 함께 담습니다. 두 작품 모두 언젠가 보았던 풍경이 떠오르진 않나요? 우리는 해변의 아름다움을 감탄하기 이전에 근방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습니다. 또, 집으로 향할 때에는 매끄럽게 포장된 길과 하늘을 올려다보길 반복하죠. 이처럼 작가는 일상적인 풍경을 기존과 다른 시각에서 담아냄으로써 각자의 서사로 재해석할 여지를 남깁니다.
순간의 냄새까지 묘사하는 사진
© Ian Howorth
이안의 작품이 놀라운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가 자연광과 그림자를 활용하는 만큼, 작품 속 사물의 질감이 도드라지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환한 빛 속에 머무는 사물은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이 공존할 때 음영이 생기면서 입체적인 이야기가 깃들죠.
© Ian Howorth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창밖에서 차 안의 풍경을 담은 첫 번째 사진을 살펴볼까요. 짙은 농도와 사용감이 느껴지는 가죽 표면, 낡은 자동차 가죽 시트의 냄새가 절로 느껴지는 듯합니다. 차 안의 온도는 어떨지, 어떤 사람이 사용했을지 이야기가 흐릿하게나마 그려지고요. 두 번째 사진은 누군가 다녀간 (지금은 자리에 없는) 테이블을 비춥니다. 깨끗이 비운 컵, 먹다 남은 감자튀김의 눅눅한 존재감, 테이블의 어수선함은 그 현장으로 감상자를 초대합니다. 두 사진 모두 분명히 존재했을 어떤 순간을 상상하게 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부재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 Ian Howorth
© Ian Howorth
이안의 사진 속에서 어떤 그리움이 느껴지나요? 아니면 외로움을 발견했나요. 이안이 포착한 장면은 마냥 행복하다거나 따스하지만은 않습니다. ‘향수’를 이야기하지만, 그 순간을 결코 낭만화하진 않아요. 홀로 남겨진 이의 고독, 거대한 풍경 속 자그마한 인간, 덩그러니 놓인 사물. 그리움과 공존하는 외로움이 작가가 전하고자 한 감정이 아닐는지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고요’입니다. 고요는 평화를 감각했던 순간을 돌이켜 봤을 때 떠오르는 잔상이고요. 소란함 속에서 평온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홀로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가질 때, 오롯한 현재를 누리게 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리운 순간은 언제인가요. 그리고 그 순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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